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조정 === * [[인조]] - 인조 재위기간 동안 이괄만큼 전폭적으로 믿어줬던 사람도 드물다. 그리고 그게 독이 되었다. * [[이귀]] - 이괄에게 유달리 잔혹하고 비정한 태도를 보였다. 이귀의 저서인 [[묵재일기]]를 보면, 이괄이 정말로 역심을 품고 있다고 믿었던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격한 행보를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357A_0010_000_0030_2004_015_XML|묵재일기(默齋日記)-치역논변(治逆論辨)]] 묵재일기에 따르면, 이귀는 사람들이 고변에 대해 발표하기를 꺼리자 당장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국청의 추관들이 "증거가 없는 것이 무고(誣告) 같다."며 고변자들을 처형하려 하자 직접 나서서 이를 막았고, 조정에서 이괄은 두고 아들만 체포하기로 결정하자 "군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들 잡혀가는 걸 그냥 지켜만 보겠는가. 일단 이괄을 체직해놓은 후에 조사하고, 결백이 밝혀지면 복직시키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반란이 터졌다고 한다. 묵재일기가 이귀 본인이 남긴 사적인 기록이라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반란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바로 "이괄을 국문하자."는 주장을 펼쳤다는 기록은 실록에도 남아있으므로, 묵재일기의 내용 역시 상당 부분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1_003|#]] 정작 고변에 연루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반란에 가담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일단 국문을 통해 진위 여부부터 밝히자."면서 이괄을 대할 때와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5_005|#]] 이후로도 이괄의 난에 휘말려 처형당한 기자헌을 사약형으로 감해줌은 물론, 그의 신원에도 도움을 줬다. * [[김류]] - 실록에 직접적으로 김류가 무엇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반란 고변이 있을 적에, 김류는 이괄을 두둔했다."는 양사의 간언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김류가 이괄을 옹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12011_001|#]] 정작 고변에 연루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국문을 할 여유가 없다."면서[* 이괄의 군세가 한양으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조리 처형시키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5_005|#]]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3_001|인조반정 당시 계획이 누설되자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려 한 것이나,]]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3_012|병자호란 이전까지 척화를 주장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슬그머니 주화로 돌아서서는]]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6021_001|척화파의 처벌에 앞장선 것 등의 행보를 감안하면,]] 이괄이 진짜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두둔했던 자신에게까지 [[역적|불똥이 튈까]][[연좌제| 두려워]] [[손절|입장을 급선회]]했던 것으로 보인다. * [[신경진]] - [[김류]]와는 아버지 대부터 친분을 쌓은 대를 잇는 절친. 단 서열은 역전으로 아버지는 신경진의 아버지인 [[신립]]이 김류의 아버지인 [[김여물]]의 상급자였으나 아들은 되려 김류가 신경진의 상급자였다. 김류와 행동을 같이 했다. * 장만 - 도원수. 관군 총지휘관. 문인 출신. 행적을 보면 딱히 유능한 군인은 아니었지만, 반정공신이었기에, 당시 조선의 군사 활동을 총괄한 인물. 관서에 [[이괄]]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사람도 바로 장만. 하지만 조기에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한다. 이괄의 난 과정에서는 자기 한계를 알고 처신했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병력을 전부 정충신에게 맡겨 실전을 치루게 하고, 자신은 후방에서 예비 전력을 편성하고 보급품을 마련하여 바로바로 정충신에게 보내주었다. 때문에 이때 장만을 가리켜 도원수는 군사 없는 장수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황주에서 정충신이 패전하고 조정에서 정충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자 오히려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정충신을 감싸고 계속 이괄 군 추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다. * [[이원익]] - 당시 영의정이자 전시 도체찰사. 쿠테타를 일으킨 인조 세력에게조차 필요한 인재로서 평가받은 내정의 1인자이다. 평안도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선조 초에 전염병이 돌던 평안도 지방을 구제해내면서 평안도 백성들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실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평안도 백성들이 이원익의 말이라면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 이 인심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평안도에서 대병력을 편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괄의 난에서는 [[김류]] 주도로 기자헌 등이 숙청되자, 공주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탄식했다고 한다. * [[흥안군]] - 인조가 수원으로 도망갈 때, 이괄이 왕으로 옹립했다. 행실이 무척 나빴으나 인조가 감싸주던 인물인데, 이괄이 패하자 도주했으나 심기원에 의해 교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